책 이야기

일득록(日得錄) - 정조

천사친구 2017. 2. 13. 15:08



독서는 체험을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니, 참으로 정밀히 살피고 밝게 분변하여 심신으로 체득하지 않는다면 날마다 수레 다섯 대에 실을 분량의 책을 암송한다 한들 자신과 무슨 상관이 잇겠는가. 문청공(文淸公) 설선(薛瑄)*이 말하기를, '독서를 함에 있어서 착실히 체인(體認)*하면 도리(道理)가 약동하는 듯이 마음과 눈 사이에 들어와 문자와 언어에 얽매이지 않게 된다.'하고, 또 말하기를, '독서를 오래도록 하여 깨달은 글 속의 이치가 자신의 몸속의 이치와 하나하나 부합되어야만 비로소 참으로 터득(攄得)*하는 것이 있게 된다.' 하였다. 나는 일찍부터 이 말을 사랑하였으니, 진실로 참다운 마음과 참다운 학문이 없었다면 이렇게 말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요즈음은 평소에 독서하는 사람이 드무니, 나는 이 점이 무척 이상하게 생각된다. 세상에 책을 읽고 이치를 연구하는 것만큼 아름답게 여길 만하고 귀하게 여길 만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일찍이 '경전을 연구하고 옛날의 도를 배워서 성인(聖人)의 정밀하고도 미묘한 경지를 엿보고, 널리 인용하고 밝게 분변하여 천고(千古)를 통해 판가름 나지 않은 안건에 대해 결론을 내리며, 호방하고 웅장한 문장으로 빼어난 글을 구사하여 작가(作家)의 동산에서 거닐고 조화의 오묘함을 빼앗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주 간의 세 가지 유쾌한 일이다.'라고 생각하였다. 이것이 어찌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서 하는 공부나 옛사람의 글귀를 따서 시문을 짓는 학문을 가지고 견주어 논의할 수 있는 바이겠는가. 그러나 애석하게도 습속(習俗)이 이미 고질화*되어 말로 해서 돌이킬 수가 없다.

책은 많이 읽으려고 힘쓸 것이 아니라 전일하고 치밀하게 읽어야 하며, 신기한 것을 보려고 힘쓸 것이 아니라 평상적인 것을 보아야 한다. 전일하고 치밀하게 읽다 보면 절로 환히 깨닫는 곳이 있고, 평상적인 내용 중에 자연히 오묘한 부분이 들어 있다. 지금 사람들은 책을 읽을 때 대부분 많이 보려고만 들고 치밀하게 읽는 데는 힘쓰지 않으며, 신기한 것만 좋아하고 평상적인 것은 달가워하지 않으니, 이것이 많이 읽을수록 도(道)가 점점 멀어지는 까닭이다.

--- 정조 대왕의 일득록(日得錄) 중에서...



※ "일득록"에 나타난 독서의 특성

독서, 즉 책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문자를 읽어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글 전체의 의미를 구성해 가는 과정이다. 정조는 "일득록"에서 이를 '몸과 마음으로 체득'하는 것, '이치를 밝히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나아가 정조는 이 글에서 독서가 사물의 이치를 파악하여 '도'에 도달하는 경지까지 나아가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 "일득록"의 편찬 의도

"일득록"은 신하들의 눈에 비친 정조의 언행을 기록한 책이다. 이 책은 정조 7년(1783) 규장각 직제학 정지검의 건의로 처음 시작되었는데, 사관(史官)의 기록과는 별도로 규장각 신하들이 평소 보고 들었던 것을 기록해 두었다가, 연말에 그 기록을 모으고 편집하여 규장각에 보관하도록 하였다. 정조는 서(序)에서 이 책을 편집하게 한 의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반성의 자료로 삼기 위한 것이며, 또한 그 기록을 통해 신료들의 문장과 논의도 살펴볼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지금 만약 지나치게 좋은 점만 강조하여 포장하려 한다면, 그저 덕을 칭송하는 하나의 글이 될 뿐이니, 어찌 내가 이 책을 편집하게 한 본뜻을 어긴 정도일 뿐이겠으며, 뒷날 이 책을 보는 이들이 지금 이 시대를 어떻다 할 것이며, 규장각 신료들을 또 어떻다 하겠는가? 이러한 의미를 규장각 신하들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다."


* 설선 : 중국 명나라 때의 학자

* 체인 : 마음속으로 깊이 인정함.

* 터득 : 깊이 생각하여 이치를 알아냄.

* 고질화 : 오래되어 바로잡기 어렵게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