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마레이스
늦은밤, 학원에서 쏟아져 나오는 학생들을 보면 아내와 일했던 공중보건의가 떠오른다. 명문대의대를 졸업하고 병역 의무를 대신해 공보의가 된 청년은 일하는 내내 명문대 간판를 내세우지 않았다. 사교적이지는 못했지만, 또래와 달러 조용하고 차분했던 그를 아내는 믿음직스러워했다.
어느날, 아내는 철제책상위에서 드르륵거리는 휴대전화 진동이 거슬려 별생각없이 공보의의 휴대전화를 집어들었다. 발신자는 '미친X'. 펑소의 그답지 않은 저장명이라 조금 의아했던 아내는 얼마 뒤 충격적인 사실을 접했다. 휴대전화에 '미친X'로 저장된 여자는 그의 어머니였다.
사연은 이랬다. 어머니는 하나뿐인 아들의 미래를 위해 강남학원가를 발이 닳도록 뛰어다녔다. 아들은 어머니가 정한 '명문대의대'라는 목표를 향해 무작정 뛰는 경주마였고, 어머니는 기수였다. 어머니의 피나는 노력은 결실을 맺어 주위의칭찬과 부러움을 받았지만, 정작 아들은 얻은게 없었다.
결국, 모든 분노는 어머니를 향했다. 아내는 보건소를 찾아온 어머니를 싸늘하게 돌려보내는 그가 솔직히무서웠다고 고백하면서, 그때 막 학원 순례를 시작한 두 딸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걱정스러워했다. 솔직히 행복한 청소년기를 위해 '존경받는 직업', '충분한 급여'를 향한 레이스를 무작정 포기할 수는 없다. 한국의 부모라면 누구나 지닌 딜레마 아닌가.
그래서 오랜 논의 끝에 아내와 나는 원칙을 세웠다. 아이들 스스로 선택하게 하자고. 요즘도 두딸은 학원을 스스로 선택한다. 우리는 제안만 할 뿐, 최종 선택은 아이들 몫이다. 시간이 흐른 지금, 아이들은 자신의 선택에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을 조금씩 깨닫고 있는 듯하다. 최소한 학원 때문에 아이들과 싸우는 일은 없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문득, 반면교사의 교훈을 준 공보의에게 아무것도 해 준 게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부끄러웠다. 부디, 그의 가슴속에 가득한 분노가 이제는사라졌기를 기원한다. 어저면 지금쯤 부모가 되어 어머니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지도 모른다. 부모란 그런 존재니까.
김경찬 님 | 흥업미디어 대표
월간 <행복한동행> 2012년 1월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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